주체26(1937)년 5월 어느날이였다.
시급히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그 부대가 위험하였다.
그리하여
국내진공을 뒤로 미루고 위험에 처한 부대부터 구출해야 하는가 아니면 국내진공을 먼저 한 다음 련이어 구출작전을 펼쳐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주력부대력량을 둘로 갈라서 두개의 작전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가, 4사부대를 구출하자면 국내의 어느 지점을 치는것이 리상적이겠는가.…
이렇게 문제점을 세우신
7련대장을 비롯한 지휘관들은 당초의 계획대로 혜산을 치자거니, 위험에 처한 부대부터 구원하고 국내진공은 그다음에 하자거니 하면서 저마다 자기 주장을 내놓았다.
그것은 적의 력량이 집결되여있는 베개봉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 고장이여서는 안되며 반대로 턱밑에 바싹 붙어있는 고장이여야 한다, 그래야 국내진공이 두가지 효과를 다 낼수 있다는것이였다.
혜산과 같이 국내의 큰 도시를 들이쳐서 세상이 들썩하게 소문을 내는것으로 짐작하고 모두 흥분돼있었는데 자그마한 산간지대의 면소재지를 쳐야 한다고 하시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보천보를 때려야 베개봉쪽에 집중되여있는 적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부대와 4사부대에 역포위될수 있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포위추격전을 포기하고 이미 진출했던 계선에서 철수할수 있다.
그러신 다음 지금 무산지구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은 적들이 이 지역에 병력을 집중하다보니 놈들의 전반적국경경비체계에 큰 혼란이 조성되고 틈이 생기게 되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보천보에로 진격을 개시한다면 놈들에게 보다 강력한 타격을 가하고 국내진공작전을 성과적으로 수행할수 있을뿐아니라 적들을 헤여나올수 없는 궁지에 몰아넣을수 있다고 교시하시였다.
지휘관들은 흥분을 억제할수 없었다.
보천보전투의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것 같았다.
회의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