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를 입력하십시오. 금지문자입니다.
전화의 나날에 꽃펴난 사랑의 이야기

    주체 41(1952)년 6월 위대한 수령님께서 포연을 헤치시며 어느 한 영예군인학교를 찾으시였을 때의 일이다.

    식당과 학생들의 방, 지어는 마당가의 우물까지 들여다보시며 생활에서 불편이 없는가를 하나하나 헤아려보신 우리 수령님께서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여 학생들에게 애로되는것이 없는가고 물으시였다.

    한사람같이 아무 애로도 없다고 말씀드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면 동무들의 상처나 한번 보자고 하시며 의족을 한 영예군인의 앞으로 다가가시였다.

    의족이 불편하지 않은가를 물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손수 그의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시고 벗어놓은 의족을 들어 세심히 살펴보시였다.

    잠시후 안색을 흐리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의족이 너무 무겁다고, 이것은 영예군인들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탓이라고 엄하게 지적하시였다.

    저 동무들이 누구를 믿고 피를 흘리며 싸웠겠는가고, 당을 믿고 우리를 믿고 자기 한몸을 바쳐 싸운것이라고, 우리 영예군인들은 금싸래기와 같이 귀중한 사람들이라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뜨겁게 교시하실 때 영예군인들은 솟구치는 격정을 금치 못하였다.

    누구나 전쟁승리밖에는 다른것을 더 생각하지 못하고있었다.

    세상사람들도 청소한 우리 공화국과 세계《최강》을 자랑하던 미제와의 전쟁을 가슴을 조이며 지켜보고있던 때 우리 수령님께서는 주체40(1951)년 3월 31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협의회를 여시고 영예군인학교를 설치하도록 하시였다.

    세계전쟁력사의 어느 갈피에도 전쟁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는 기록은 없건만 영예군인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주시고 찾아오시여 그들의 생활을 친부모의 심정으로 돌봐주시는 우리 수령님이시였다.

    영예군인들자신도 전쟁시기인것만큼 의족이며 의수를 만들어준것만으로도 만족해하고있었지만 우리 수령님께서만은 더 쓸모있고 간편하게 만들어주지 못한것을 가슴아파하시였던것이다.

    영예군인 한사람한사람을 미더운 눈길로 둘러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 처녀영예군인의 얼굴에서 시선을 멈추시였다.

    화상당한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이어린 동무가 이렇게 부상을 당했다고 하시며 어디서 부상당했는가고 물으시였다.

    그의 부상당한 왼손을 만져보시며 잠시 생각에 잠겨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이 동무의 얼굴을 잘 고쳐줄수 없겠는가에 대하여 알아보시였다.

    치료를 잘하면 될수 있다는 일군들의 이야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꼭 고쳐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딸이 이렇게 되였소, 우리가 내 딸이 이렇게 되였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고칠수 있소! 꼭 고쳐줍시다라고 교시하시였다.

    처녀는 위대한 수령님께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수가 없었다.

    잠시후 용감한 처녀가 울면 되는가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처녀의 앞에 오시여 다시 손을 잡아주시면서 걱정말라고, 이제 미국놈들을 몰아내고 다 고쳐주겠다고 거듭 이르시였다.

    처녀는 뜨거운 격정속에 그이를 우러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영예군인들을 아무러한 불편도 없도록 잘 보살펴주라고 일군들에게 몇번이고 당부하시고서야 차에 오르시였다.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피를 흘린 영예군인들을 이 세상에 보란듯이 내세워주시려는 우리 수령님의 사랑은 얼마나 위대하고 뜨거운것인가.

    전화의 불길속에서 태여난 전설같은 사랑의 이야기는 어머니당의 은혜로운 품속에서 혁명의 꽃을 계속 피워가고있는 영예군인들만이 아닌 우리 인민 모두의 마음속에 오늘도 소중히 자리잡고있다.